‘마산 청주’ 명성 잇는 전통주, 창원에서 부활 꿈꾼다

중앙일보 2022-0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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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 장지연 선생이) 병원에서 작고하기까지 시국을 개탄하며 아침부터 취침할 때까지 술로써 울분을 토했다.”
 
옛 경남 마산의 언론인 김형윤(1903~ 1973)이 기록한 『마산야화』 속 내용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우국지사인 위암 장지연(1864~1921)의 말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위암은 1905년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을 통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후 경남 진주에서 경남일보 주필을 지내다 마산에 왔다. 당시 기록에는 “(위암이) 술을 수정(마산 수성동) 석교양조장에서 판매한 대전청주를 두주(斗酒·말술)로 비치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거나하게 취하면 (일본인들을 향해) ‘개 같은 놈들…’을 연발했다”라고도 썼다. 위암이 마산에서 생산된 청주를 ‘말술’로 가져다 놓고 온종일 마시며 시국을 개탄했다는 내용이다.
  
위암 장지연 선생, 망국의 한 청주로 달래
 
망국의 한을 술로 달래던 위암 선생이 청주를 말술로 들일 수 있었던 데는 마산의 당시 상황과 연관이 깊다. 일제강점기 당시 마산은 청주와 간장 등을 만드는 양조업이 크게 번성했다. 일본인들이 1889년 개항 후 좋은 물과 쌀, 기후를 갖춘 마산에 술과 간장 공장을 세운 게 시작이다. 마산의 첫 청주 공장은 1904년 일본인이 세운 아즈마 양조장이다. 이후 1920년대에는 10개가 넘게 들어섰다. 1928년 마산의 12개 청주공장에서 1만1000석(1석=15말, 198만ℓ)의 청주를 생산해 국내 1위의 생산량을 기록했다.
 
‘주도(酒都·술의 도시)’로 불린 마산의 술은 당시 한반도를 넘어 만주까지 명성을 떨쳤다.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선 ‘조선의 나다주...

기사 원문 :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078852?cloc=daily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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